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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낡은 것 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콘크라베 영화 줄거리

by hope31 2025.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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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 사실에 위기가 존재한다. 이러한 공백 상태에서는 아주 다양한 병적인 증상이 출현한다.” 이 구절에서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낡은 것은 가고 새것은 아직 오지 않은>이라는 책 제목을 따온다. 그는 저서에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그러므로 현 체제의 위기를 분석한다. 가중되는 위기와 난망한 대안이라는 현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그의 표현은 책을 떠나 다양한 상황에서 인용되어 왔다.

 

다수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에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당신이 정의하는 현실의 엉망진창임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무엇으로 문제적인 현체제를 대체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 뽑기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는 단지 과정에 대해서가 아닌 우리의 체제가 어떻게 맞물려 작동하는지, 그것이 어떤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늘의 뜻과 인간의 일

 

성당은 하느님의 집이다. 하늘의 뜻에 따라 인간이 지은 하느님의 집이다. 그리고 <콘클라베>는 하늘의 몫이 아닌 인간의 일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이다. 혹은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로 구현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콘클라베를 하기 위해 모인 추기경들의 출신 국가와 민족은 다양하며, 라틴어 혹은 영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나눈다. 이것은 하늘의 형제들에게 국경이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문화 혹은 언어권의 추기경끼리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추기경들의 입장도 다르다. 변화하는 사회 앞에서, 그리고 쏟아지는 국제적 의제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진정으로 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들은 각자의 견해가 있다. 동성애자를 축복할 수 있는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할 수 있는지,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전통으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바꾸어야 할 것으로 봐야 하는지 논쟁한다. 그간의 인품과 행실도 평가 대상이 된다. 관리자 역할을 맡은 로렌스도 스스로를 관리자라며 되뇌지만, 콘클라베의 향방에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장르가 정치 스릴러물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붉은 추기경들과 푸른 수녀들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 뽑기에 관한 이야기로 교황이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 그러므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추기경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추기경은 서품을 받아야 하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최고의 성직 계층이다. 천주교에서 평생 신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정한 이들, 즉 직업적 종교인에는 신부와 수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은 다르다. 신부는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하는 성직자이며, 수녀는 수도자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교황이 될 자격이 있는 추기경이 될 자격은 남성인 신부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다르게 말해보자. 교황 뽑기 과정인 콘클라베는 남자만의 일이다. 세상의 많은 ‘중요한 것’들이 정해지는 방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종교 역시 하늘의 뜻을 인간이 실행하기에, 인간의 방식으로밖에 그 뜻을 담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영화는 질문한다. 콘클라베 중에는 걸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추기경 외에는 누구도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하루의 투표가 끝나면 걸어 잠갔던 문이 열린다. 탁탁탁. 투표용지가 떨어지는 소리. 혹은 추기경들이 먹을 밥을 하는 수녀들의 칼질 소리. 붉은 옷을 입은 추기경과 대비되는 푸른 옷의 수녀들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 말 없이,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콘클라베의 과정이 온전히 진행되기 위해 수녀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 두 집단을 대조한다. 이 붉은 세상에서, 푸르른 수녀는 너무나 잘 보인다.

 

미래는 이렇게 온다

 

“당신은 전쟁을 아는가?” 전쟁과 기아, 폭력의 현장에서 묵묵히 사역해 온 한 추기경의 마음을 다한 연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교황으로의 당선과 이를 기뻐하며 결과를 받아들이는 추기경들. 영화 막바지의 당황스러울 만큼 순조로운 과정은 중반부까지 영화에 몰입했던 관객들을 의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치밀하게 짜낸 개연성을 스스로 밟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이어 밝혀진 신임 교황의 비밀 앞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의아함에 기울였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임 교황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 역시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교의 엄격한 규율하에 교육받았음은 그가 여자 역시 아님을 말해준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는 2025년 취임식에서 ‘성별은 여자와 남자만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발언에서 여성은 ‘특정 상황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그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성을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인간의 성별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외부 생식기 혹은 염색체는 절대적이지 못하다. 대표적으로 인터섹스로 태어나는 이들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유아기에 발견될 경우 부모에 의해 특정 성별로 교정하는 수술을 받으며 호르몬 치료를 생애에 반복하게 되며, 해당 과정은 개인에게 혼란을 주기도 한다.

 

신임 교황 베니테스는 인터섹스로 추정되며, 유아기에 특징이 발견되지 않아 교정 수술을 받지 않은 채 남성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맹장 수술 중 자궁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초기에 그는 교정 수술을 받으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고 증언했다. 그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드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교황이 될 것을 바라지 않았으나 콘클라베의 결정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로렌스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충격에 빠진다. 이 결정이 닫힌 공간 교황청에 마침내 불러들일 혼란을 앞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혼란에 빠진 로렌스가 바라본 창문 밖에는 하얀 벽을 배경으로 세 명의 수녀가 걸어 나온다. 미래는 이렇게 온다는 것을 로렌스는 깨닫는다. 로렌스는 이 변화를 하늘의 뜻을 대리하는 교황청이 영속할 방법으로 받아들인다. 선서에 따라 콘클라베는 신의 뜻. 남자도 여자도 아닌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는 것이 신의 뜻이므로. 관객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어쩌면 개연성마저 깨버리는 이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위기의 세상에서 미래를 바라는 절박한 마음임을 생각한다. 감독이 우리에게 보여준 미래의 얼굴은 베니테스의 얼굴이었다. 신의 탑에 존재하지 못했던 수녀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난처하게 바라보는 로렌스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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