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의 세상
참 담백하고 끈적임이 하나도 없는 영화다. 조금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게 가을 날씨 같다. 미야케 쇼 감독의 <새벽의 모든>을 보고 처음 했던 생각이었다. 이후에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보면서는 복싱을 소재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구나, 생각했다. 미야케 쇼 감독의 모든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와일드 투어>는 궁금하면서도 어떻게 봐야 할지 알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러던 중 한 달간 <와일드 투어>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상영되는 미야케 쇼 감독의 <와일드 투어>를 관람하고 왔다.
왜 와일드일까?
우리는 우리 주변을 둘러싼 식물의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익숙하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식물들은 언제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까. 야마구치 DNA 도감 워크숍은 야마구치에 있는 익숙하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식물들을 찾고 수집하며 DNA를 채취하여 도감을 만드는 워크숍이다. 참여자들은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발견한 식물의 위치를 기록하고 채집한다. 이를 통해 식물의 DNA를 관찰하고 이름을 알게 된다. DNA 도감 워크숍이 열리는 야마구치 아트센터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대학생 우메는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인 타케와 슌을 데리고 야마구치의 자연을 돌아다닌다. 함께 채집하고 서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세 사람은 서서히 친해진다.
제목이 와일드 투어인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등장인물들이 자연을 돌아다니며 채집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인물들이 채집 활동 동안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한, 홈비디오를 연상시키는 날 것의 영상 또한 제목의 의미에 포함된다. 관계자 외 금지, 진입금지 등의 푯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타케와 슌을 비롯한 중학생으로 보이는 다른 워크숍 참여자들도 경계를 마음껏 넘어다닌다.
마지막으로, 와일드 투어의 의미는 인물들의 서로를 향한 마음과도 연관이 된다.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짧은 순간
세 사람이 함께 채집 활동을 이어가던 어느 날, 슌은 입시를 마치고 유메 선생님에게 고백할 거라고 친구 타케에게 털어놓는다. 슌의 마음을 알게 된 타케는 황급히 우메를 찾는다. 우메를 찾은 타케는 지금까지 함께 하면서 즐거웠다고, 자기가 고등학생이 되면 사귀지 않겠느냐고 고백하는 편지를 건넨다. 고백 선수 치기를 한 것이다. 우메는 타케에게 너는 남동생 같은 존재라고, 너는 앞으로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 자신은 곧 미국으로 떠난다고 밝힌다. 이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우메가 음료수를 뽑으러 가고, 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세 사람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담긴 영상에서 우메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다. 타케가 우메를 피해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음료수 3병을 든 채 타케를 찾던 우메는 입시가 끝나면 돌아오겠다는 슌에게 알겠다고만 답한다. 자신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균형을 이루던 세 사람의 즐거운 시간은 완전히 끝이 난다.
과연 완벽한 때는 언제였을까. 우메가 미국으로 떠나는 걸 모르는 채로 입시 공부를 하고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알게 되는게 슌에게는 더 나은 일이었을까? 타케에게는 우메가 떠난다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게 나은 일이었을까?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우메는 슌과 타케를 장난스럽게 인터뷰한다. 좋아하는 명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타케는 나폴레옹이 한 말이라며, 현재의 불행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과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쩐지 자기계발서에 등장할 것 같은 말이다.
슌은 필요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우메와 타케에게 지금은 즐겁지 않은 거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을 받는다. 계속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슌의 소망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우연과 영향이 필요한 걸까. 슌이 말하는 즐거움 속에는 우메와 타케가 포함될 것이다. 우메가 미국으로 떠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마도 우메의 전 남자 친구가 우메와 다시 사귀기로 결정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우메는 남아도 슌에게는 마음의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니까 슌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시간, 모든 것이 꽤 다정하고 완벽하게 느껴지는 시간은 많은 요소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짧은 시간이다.그렇기에 타케가 좋아하는 명언은, 미래의 괴로움을 피하고자 현재를 성실히 살아간다는 말과도 같은 그 명언은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는 수많은 요소가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펼쳐지는, 계속해서 변하는 것이므로 한 사람의 노력이 거기에 기여하는 바는 어쩌면 미미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력이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특히나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자라나고 변화하기
슌과 타케, 그리고 우메 일행뿐만이 아니라 워크숍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채집 활동도 카메라에 담긴다. 그리고 인물들이 숲과 들을 탐험하는 장면에서 종종 밑에서 위를 바라본 나무들의 모습이 담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촘촘한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빽빽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간격을 지켜 자라난다는 얘길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얼핏 무질서하게 자라나는 것 같은 나무들에도 그들만의 규칙이 있다.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 하늘을 보이게 하는 틈은 나무들이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다.마지막 장면에서 체육복 차림의 슌이 야마구치 아트센터를 방문한다. 슌은 마음을 고백하려던 것인지 우메를 찾는다. 누군가가 나와서 우메는 미국으로 떠났고, 우메가 반가워할 테니 연락해 보라고 말한다. 이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슌이 농구부 활동을 시작했음을 알게 된다. 건물 밖으로 나온 슌을 맞이하는 건 기타 가방을 메는 타케다. 워크숍 이후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관객들은 모르는 시간을 보내며 각자의 변화를 거쳤다.
우메가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풍경이 펼쳐지고, 슌은 우메에게 보낼 거라며 한창 워크숍을 함께 했었던 야마구치 아트센터 바깥의 풍경을 카메라로 찍는다. 내 주변을 둘러싼 현재를 기록하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익숙하지만 잘 모르던 것을 알아가는 것. 타케는 뭐하러 그러느냐고 말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노력'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보상 받을 것이란 기대 없이 그저 현재를 충실히 한다는건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 다른 곳에 데려다놓는 것일지도 모른다.작은 돌 하나를 구석구석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감탄하던 우메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하고, 무슨 이유에선지 슌이 농구를 시작하고 타케가 음악을 시작한 것처럼.
딴 얘기: 주변의 사소한 변화
<와일드 투어>를 보고 나서 현재에 충실하다는 건 뭘까 생각했다. 작은 돌을 살펴보며 감탄하는 우메의 모습을 보며 일상에서 사소한 것을 보며 감탄했던 일이 있었나 되짚어 봤다. 그리고 톺아보며 느낀 사소하지만, 즐거운 변화들을 자기 마음을 전하는 영화 속 인물들처럼 남겨보고 싶었다.아주 미묘하다고도 할 수 있는 변화지만 나의 가을 일상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친 변화를 공유하고 싶다. 이 또한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일 테니.
첫 번째는 창밖 풍경이다. 글도 쓰고 책도 읽고 밥도 먹는, 공식적으로는 서재이지만 이것저것 하는 용도인 작은방 창문으로 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보인다. 여름 동안은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었었다. 가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요새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까마귀, 까치, 참새, 그리고 미처 이름을 모르는 새들까지 분주히 감나무에 방문한다. 평소보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드높고, 아침이면 큰 방까지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새뿐만이 아니라 어느 날은 밥을 먹다가 담벼락 위의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종종 내가 사는 빌라 입구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치즈 태비 고양이인데 창문을 통해 마주치니 새로웠다. 고양이들이 다니는 길은 어디일지, 어떻게 여기로 나타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