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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위로보다 진심 같은 것 - 아노라

by hope31 2025. 5. 7.

철부지 재벌 2세의 ‘돈’에 눈이 멀어 성사된 계약

뉴욕의 스트립바에서 일하는 스트리퍼 ‘아노라’는 손님인 ‘이반’의 집에 초대받는다. 집에서 돈을 받고 서비스(…)를 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의 엄청나게 화려한 집에 방문한 아노라는 이반의 부모가 러시아의 재벌이란 걸 알게 된다. 이반은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신년 축하 파티에도, 일주일간 ‘베가스’로 놀러 가는 일에도 초대한다. 물론 돈은 주겠다고. 계약이 성립되어 아노라는 이반과 화려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베가스에서 돌아가기 전날 밤, 이반이 갑자기 아노라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결혼하면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으며, 자기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아버지 회사에서 일할 필요가 없다고. 아노라를 따라 미국인이 되기 때문에. 그의 결혼의 이유가 수상하다는 걸 모르는 건지 아노라는 그의 고백이 진심인지만을 몇 번이고 되묻는다. 그가 몇 번이고 그렇다고 말하자, 그들은 그날 밤 바로 결혼을 해버린다(?) 만난 지 2주 만의 결혼, 그야말로 초고속 결혼이다.

이 막장 스토리에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싶었다. 그러다 이 초고속 결혼에 아주 이상한 게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스트립 서비스와 결혼 모두 ‘계약’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아노라는 성노동자다. 그런데 그 서비스, ‘성’은 마치 사랑 같기도 하다. 물론 이는 성이 사랑의 일부일 뿐인데 그 반대라 생각하면 벌어지는 착각이다. 성은 사랑의 한 방식일지 몰라도 그 자체로 온전한 사랑이 되는 건 아니다. 멀쩡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라면 성과 사랑이 명확히 다르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일인 아노라, 성과 사랑 사이에서 능숙하게 줄타기를 하던 아노라가 이번엔 착각을 한 것 같다.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던 그녀가 사랑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결혼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노라가 계약에 익숙했으니, ‘서비스’에서 ‘결혼’으로 계약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스트리퍼는 돈을 받고, 아내는 공동의 재산을 관리한다(이렇지 않은 결혼도 있겠지만은)는 점에서 보면 상당히 유사해 보이기도 한다. 이반의 ‘내가 아니라 내 돈을 사랑하느냐’는 장난 섞인 질문에 대차게 맞다고 대답하는 아노라를 보면 그녀가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해 왔듯이 돈을 보고 결혼한다는 게 명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노라는 결혼이 서비스보다 무겁다는 걸 알았다. 정확히는 결혼에 필요한 ‘진심’이 무겁다는 것을. 진심은 무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니까. 돈만으로는 무를 수 없는 걸 의미하니까. 진심, 즉 사랑은 그런 거니까.

계약의 관점에서 보면 돈을 받고 성을 내어주는 방식의 계약을 하던 아노라가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며 사는 방식의 계약을 맺게 된 셈이다. 그러나 스트리퍼였던 사람이 아내가 되기 위해서는, 스트리퍼의 고객이 남편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진심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마음의 교류, 최소한의 시간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 살아온 삶에 관한 대화와 살아갈 인생에 대한 계획도 필요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옆에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을 받고 성을 제공하는 게 익숙했던 아노라는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가 소유한 막대한 돈에 눈이 멀어서. 그 돈이 아노라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계약에서 놀이로 전락한 결혼

철부지와 철부지의 ‘돈’에 넘어간 여자의 환상적인 케미스토리(?)는 그들의 결혼 소식이 ‘토로스’의 귀에 들어가면서 변화를 맞이한다. 여기서부터 영화가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분위기가 확 바뀐다. 이반 부모의 하수인이자 이반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토로스는 이반의 결혼 소식, 게다가 결혼 대상이 스트리퍼라는 걸 듣고 팔짝 뛴다(여기서부터 이 결혼이 망했다는 걸 직감하게 된다). 토로스는 부하인 ‘가닉’과 신입 ‘이고르’를 이반의 집에 보내 사실인지 확인하라고 한다.

 

이반은 집에서 게임에 한창이다. 아노라는 전화가 오는데도 무시하는 이반을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묻는다. 이 결혼, 부모님께 허락받은 거지? 이반은 그렇다고 말하고 게임에 집중한다. 그때 울리는 현관 벨소리. 이반은 가닉에게 결혼 서류를 보여주어 결혼했다고 주장한다. 아노라도 우리가 결혼한 게 맞으니-아내의 권위로-얼른 이 집에서 나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닉이 이 결혼은 무효이며, 이반의 부모가 무효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오고 있다고 말하자마자 이반이 냅다 줄행랑친다. 아노라를 두고서. 아노라를 두고서 말이다. 진짜 한심하기 그지없는… 욕이 자연스레 나오는 장면이다.

 

아노라는 이반을 따라 도망치려고 하지만, 그녀를 전담한 이고르에게 붙잡힌다. 물론 얌전히 붙잡힐 리가 없다. 맞다, 아니다, 살려달라, 그만해라, 이거 풀어라, 풀지 마라… 그 과정에서 다치는 건 생뚱맞게도 가닉이다. 이반의 집에 도착해 처참한 광경을 본 토로스는 잠시 정신이 나간 듯하더니 그래도 하수인 중에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답게 차차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반의 아내인데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던 아노라가 점차 현실을 깨닫고 차분해지면서 이 소요는 진정된다. 4캐럿 반지를 빼앗긴 그녀는 1만 달러(이반이 그녀를 집에 초대했을 때 건넨 액수와 일치한다)를 받는 조건으로 결혼 무효에 동의하기로 한다. 그러나 계약을 무르기 위해선 양측 당사자가 필요하기에, 다 같이 이반을 찾으러 떠난다.

차를 타고 떠돌며 이반을 추적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이다. 날뛰던 아노라를 붙잡고 설득할 때 모두가 꽥꽥 소리를 질러댔던, 그 미쳐 돌아가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반을 보고 싶어 하는 아노라, 아노라한테 맞아 부러진 코뼈로 괴로워하는 가닉, 아노라한테서 온갖 모욕을 듣는 이고르, 조급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토로스, 그들은 이반이 있을 만한 곳을 쥐 잡듯 파헤치고 다닌다. 기물파손, 무단침입, 시비, 협박은 물론이다.

 

한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이반이 아노라가 일하던 스트립바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가보니 이반은 술에 잔뜩 취한 채, 아노라를 유독 싫어하던 한 여자에게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아노라는 그 여자를 떼어놓고 그와 대화를 시도한다. 아노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 결혼을 무효로 만들려는 이들을 막아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나가 술만 찾는 이반을 보며 그 기대마저도 식는다. 다음 날 아침, 술이 제대로 깨지도 않은 이반을 데리고 변호사와 뉴욕의 한 법정에 들어선 그들은 이반과 아노라가 베가스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무효 처리를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곳에서 무효 절차를 밟고 부모를 맞이하려던 토로스의 수습 계획은 그렇게 실패하게 된다. 결국 공항에 가서 이반의 부모가 탄 전용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된다.

아노라는 어쩌면 이반의 부모가 자신을 반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맞이한다. 그러나 부모의 개차반(?) 같은 태도, 그리고 부모한테 꼼짝없이 잡혀 아노라와 이 결혼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반의 태도에 그녀는 질려버린다. 자신이 놀아났다는 걸 알게 된다. 이건 결혼 계약도 아니고 그저 결혼 ‘놀이’였던 것이다. 베가스에서의 결혼 무효 처리는 아노라의 사인 한 번으로 끝났다. 그녀는 종이와 펜을 내던지고, 자신이 입고 있던 이반의 물건들을 죄다 던져버리고 나간다. 아노라가 이제 이반을 떠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그들과 작별하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면 된다.

 

약간의 돈도 챙겨 들고서. 그런데 왜 이리… 쓸쓸할까? 결혼 무효를 막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아노라가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서비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 계약을 했지만,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로 벅찼지만, 실은 이반에게 진심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진심을 ‘가치’라 생각한 아노라와 달리 이반은 진심을 ‘가격’으로 생각했다. 이반에게 진심은 지폐 같은 거라서 숫자가 얼마나 커져도 그 무게는 종이 한 장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아노라는 그것도 모르고 이반에게 진심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애초에 진심이 뭔지도 모르면서 진심을 외쳐댄 이반에게 말이다. 그녀가 쓸쓸함을 느끼는 건 그 진심이 가차 없이 버려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의 목격자가 해줄 수 있는 것

이 영화를 단순히 현대판 신데렐라의 실패담이라고 할 수는 없다. 황홀한 꿈과 처참한 밑바닥을 확인하는 과정에, ‘위로’의 시선이 살포시 더해지기 때문이다. 충동적으로 피어난 사랑이 애초에 장난감이었음을 확인한 아노라가 느낄 허무함을, 마치 관객을 대변하는 것 같은 존재가 위로한다. 바로 이고르다.

그는 아노라를 전담 마크하기 위해 온 인물이었다. 처음엔 오로지 가닉과 토로스의 명령만을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저항하던 아노라가 진정되고, 도망친 이반을 찾아내고, 이반의 부모가 도착하는 등 상황이 진척되어 자신의 역할이 줄어들면서 이고르는-아노라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관객들처럼-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점차 변한다. 어떨 때는 그녀에게 스카프를 주기도 하고 어떨 때는 술을 건네주기도 한다. 베가스로 가는 전용기에 타지 않겠다고 뒤돌아선 아노라가 이반의 엄마에게 소름 돋는 협박을 들었을 때는 아예 바로 앞에서 아노라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고르는 하수인 중에서도 하수인이기 때문에 철저히 이반의 사람이지만, 하수인들조차 개입할 수 없는 중요한 순간부터는 이반의 사람에서 자유로워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관객이 아노라가 느끼는 허무함과 무력감에 가까이 가 있을 때, 이고르도 그 자유로 그녀 가까이에 가 있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아노라의 ‘현실 복귀’ 역할을 맡게 된다. 상황을 수습한 토로스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반이 아노라의 ‘비현실 진입’을 맡았다면 이고르는 복귀를 맡게 된 것이다. 재벌 2세의 에스코트와 하수인 중에서도 하수인의 마지막 배웅. 말만 들으면 쓸쓸하기 짝이 없지만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게 그려진다. ‘돈’에서 자유로운 이반이 그 자유로 아노라를 사용한 것과 달리, ‘상황’에서 자유로운 이반이 그 자유로 아노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바라보는 자의 배웅이 그러한 쓸쓸함조차 아름답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노라가 이반의 집에서 보낸 마지막 밤과 그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고르는 더 이상 하수인이 아니라, 아노라가 겪은 사건의 목격자로서, 구겨지고 지저분해져서 종이 한 장만도 못하게 된 그녀의 진심의 목격자로서 아노라에게 위로를 전해준다. 자신을 ‘애니’라고 줄여 불러달라는 아노라에게 아노라라는 이름이 가진 뜻(‘석류’, ‘빛’)이 좋다고 알려주고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으며, 결혼반지를 몰래 빼돌려 돌려주는 깜찍한 방식의 위로도 해준다.

 

그런데 아노라는 그런 위로에 ‘서비스’로 보답한다. 자기는 위로에 보답하는 방식을 그것 말곤 모른다고 하는 듯이 보여 슬프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위로는 보답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니다. 위로는 상대가 느끼고 있는 감정에 솔직해지라고 하는 주문의 시선, 나도 그런 걸 느꼈다는 공감의 손길,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이자,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안부인사다. 건네지는 것이 다다.그러나 아노라가 서비스를 해주자 이고르도 잠시 흔들린 듯하다. 키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노라가 거절하자 이고르는 그녀를 안아주기로 한다. 그조차 거절하던 아노라는 무언갈 느꼈는지 결국 무너져 이고르의 품 안에서 엉엉 울게 된다.

 

그토록 무너지지 않고 버티던 그녀가, 여기에서도 서비스를 하려고 했던 그녀가 그의 위에서 완전히 무너져 운다. 회복하기 위해선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게 무너진 상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아 보이려고 애쓰는 것보다 괜찮지 않다고 솔직하게 전부 쏟아내는 게 더 낫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비로소 울 수 있게 된 건 그걸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영화는 슬픔처럼 쌓여가는 차가운 눈(때마침 눈이 오고 있었다)을 밀어내는 와이퍼 소리를 남기고 끝이 난다. 세상에 그것 말고는 위로를 나타낼 수 있는 더 정확한 소리가 없는 것처럼 들리는, 그런 소리다. 당신도 꼭 그 소리를 들어보기를 바란다.

눈이 계속 쌓여도 계속 닦아주겠다는 와이퍼의 그 무심함이 그 어떤 위로보다 진심처럼 느껴지는 영화였다.